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구
1. 식민통치기구의 성립
한국민족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제도는 식민지 본연의 경제상 목적보다는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상의 전진기지로서 한층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통치기구는 헌병을 활용한 무단조직, 즉 무관총관이 전권하는 군사정치체제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식민통치’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배경시점부터 발발 당시, 전쟁 중, 종전, 그리고 그 후로 나누어 제 1차 세계대전이 중동지역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보고 정리해본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본 보고서에서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직․ 간
식민통치
1. 문제발언의 원형 : 구보전발언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 위원회의 제 2회 회의 석상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인 久保田가 한국대표와의 논쟁 중에 행한 발언-‘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
♢岡崎외상 : ‘
식민지 통치와 문화 침략의 한 기구로서 연구되고 평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경성제대는 조선총독부의 교육, 문화정책은 무론 식민지 통치정책 전반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설치. 운영되었다. 이곳에서 배출된 2,300여명의 일본인 및 한국인 고급인력들은 대부분 한반도는 물론 일본이나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을 잘 무마하면서 착취하는 방법을 알았지만 일본은 이런 노하우가 전무했고 심지어 폐쇄적인 문화적, 역사적 배경으로 이민족을 대하는 방법도 부족했다.
1910년 8월 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지배기구 및 통치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지배기구로 조
통치권의 총람자(대일본제국헌법 제1조, 제4조), 다시 말해 신적인 권위를 가진 주권자라고 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계엄령'은 대일본제국의 “헌법체제의 천황절대주의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며, “일본전래의 군권절대의 ideology와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한말·1910년대 일제의 식민통치
Ⅰ. 구한말 통감부의 식민지 사회 기초 형성
1. 통감부, 이사청의 설치
1) 1905. 12. 20. 칙령 제267호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
- 통감은 일본 왕에 직속, 한국 수비군 사령관에 대하여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으며, 통감부령을 발하고, 이사청의 위치 및 관할